오랜 기간 격렬한 전투를 겪은 일본군은 중국 여성을 동등한 인간이기보다는 전쟁으로 얻은 일종의 전리품으로 보아, 승리감이나 정복욕, 혹은 적개심과 복수심을 발산하는 데에 이용하는 물건처럼 대하였다. 난징대학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일본군은 중국 내 ‘위안부’를 다른 어떤 지역의 여성들보다 더 잔혹한 방식으로 다뤘다.
중국인 ‘위안부’
난징의 여학교에 여학생들이 피신해 있었는데, 일본군이 총검을 들고 들어와 여학생을 일정 인원 이상 모집해서(‘위안부’로) 보내라고 협박하였다.
‘위안부’의 모집은 상당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 외국 선교사가 세운 난징의 여학교에 여학생들이 피신해 있었는데, 일본군이 총검을 들고 들어와 여학생을 일정 인원 이상 모집해서 (‘위안부’로) 보내라고 협박하였다. 1940년 8월 일본군이 중국 차오현을 점령했을 당시, 보병 연대장 스즈키 히라쿠는 차오현에 위안소를 설치하라 명령하였는데, 그는 나중에 이 위안소를 운영하기 위해 중국인 및 조선인 여성 20명을 납치했다고 진술하였다.
이와 동일한 선상에서 때때로 일본군 장교들 중 일부는 마음에 드는 여성을 따로 감금하여 사적으로 ‘위안부’를 취하기도 했다. 또한 표면적으로 일본군은 중국인들의 저항과 반발을 사지 않기 위해 강간을 금지하였지만, 강간은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군인들은 그 사실이 탄로날 것을 두려워해 피해 여성을 살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중국 위안소
대도시에서는 장교용 위안소와 일반 사병 위안소를 구분하여 설치하기도 했으며 설치된 위안소의 규모 또한 다양했다.
일본군은 점령지마다 위안소를 세우며 다른 지역의 여성들을 트럭에 실어 강제로 이동시켰다. 대도시에서는 장교용 위안소와 일반 사병 위안소를 구분하여 설치하기도 했으며 설치된 위안소의 규모 또한 다양했다. 일반 사병 위안소에는 주로 중국인 ‘위안부’가 배치되었는데 이는 언어가 달라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말이 통하는 일본인이나 조선인 ‘위안부’는 장교용 위안소에 배치되었다.
각 점령지의 위안소로 이동된 여성들은 자신들의 친족공동체와 생활환경에서 멀어지게 되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본군과 한편이었다는 오해를 사거나 나쁜 소문에 시달리는 등 당시 정절 이데올로기가 강했기 때문에 여성들의 피해는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일본군 주둔 시기를 겪었거나 전쟁 피해를 전해 들은 주민들은 일본군이 점령기에 세운 수탑, 사령부 건물, 위안소 건물 등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 침략의 기억이 마을 내 구체적인 장소와 연결되어 있어 위안소를 비롯한 전쟁 피해가 단순히 여성에게만 그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939년 일본군의 허가 아래 업자 양수이창이 운영한 위안소
중국 상하이시 황푸강 근처의 차오전(草鎭) 지역 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