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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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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나무막사로 지어진 상해 육군 오락소 전선의 이동으로 일본군 트럭에 실려 이동중인 위안부들 위문대(慰問袋) 만들기에 동원된 한국인 부녀자들

정의

일본이 만주사변(1931.9.18)을 일으킨 이후부터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1945년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설치한 ‘위안소’에 강제동원되어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문헌과 증언 속에서는 작부, 특수부녀, 추업부(醜業婦), 예기, 창기, 여급 등의 호칭으로 나타나고, 위안소도 육군오락소, 구락부, 군인회관, 조선요리옥 등의 호칭으로 불렸다.

명칭 및 성격규정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 동원되어 일본군의 성노예로 이용된 피해자들을 지칭하는 용어에는 일정한 가치판단이 내포되므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 가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90년대초반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떠올랐을 때는 ‘정신대(挺身隊)’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정신대는 ‘일본 국가(천황)’를 위해 솔선해서 몸을 바치는 부대라는 뜻으로 일제가 노동력 동원을 위해 만든 것이었다. 정신대(노무동원)와 ‘위안부’(성동원)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달랐으나, 여자근로정신대 동원 여성이 ‘위안부’로 끌려간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의미가 호도되어 잘못 사용된 것이었다. 이후 연구를 통하여 당시 사용되었던 용어와 가까운 “ 일본군‘위안부’ ”라는 용어가 정착되었다.
1990년대 일본에서는 ‘종군‘위안부’’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종군’이라는 말에는 ‘종군기자’,‘종군간호사’처럼 자발적으로 군을 따랐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강제로 일본군‘위안부’를 동원했던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은폐시킨다는 점에서 사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용어이다.

국제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문제를 처음 제기했을 때는 ‘위안부’라는 단어를 직역하여 comfort wome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는 UN 등 국제사회에서 성노예(military sex slavery)와 군대성노예제도(military sexual slavery)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1996년 UN인권위원회에 제출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Radhika Coomaraswamy)보고서는 이 문제를 명확하게 전시하 군대성노예제 (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로 규정했다.

국제사회에서 ‘군대성노예제’라는 용어를 채택한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사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 매춘의 성격이나, 국가를 위한 국민의 자발적인 희생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널리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군‘위안부’는 국가가 여성을 강 압적으로 동원하여 집단적인 성폭력을 가한 것이고 피해 여성들의 삶의 조건은 ‘노예’와 같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위안부’라는 단어는 지극히 가해자 중심의 용어이며 폭력성과 강제성을 감추는 부정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다. 일본군‘위안부’의 모집동기, 모집과정, 폭력성을 고려한다면 일본군‘성노예’라는 명칭이 적합하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일본군‘성노예’라는 용어보다 일본군‘위안부’라는 용어를 널리 사용하고 있다. ‘‘위안부’’라는 용어가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기에 적합 하지 않지만 동시에 일제가 ‘위안부’라는 용어를 만들어가며 제도화했던 당대의 특수한 분위기를 전달해 준다는 점과, 생존자들이 자신을 ‘성노예’로 부르는 데에 정신적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의 지원을 위해 한국 정부가 제정한 법에서도 ‘일본군‘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연구자 중에는 일본군이 사용했던 ‘‘위안부’’라는 단어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작은따옴표를 붙여 “ 일본군‘위안부’ ”라고 쓰기도 한다.

일본군 ‘위안소’의 형성과 동원규모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에 침략전선을 확대해 나갔다.

일본군은 ① 현지 여성에 대한 강간 방지 ② 매춘에 의한 성병 예방 ③ 병사들의 성적(性的)인 위로를 명목으로 ‘위안소’를 설치하였다. 1932년 1월, 중국 상하이(上海)에 일본군 ‘위안소’의 초기적 형태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군의 ‘위안소’는 급속히 늘어났으며 일본군의 점령지 확대에 따라 일본군‘위안부’의 동원지역도 확대되었다.
중일전쟁 이후 위안소의 설치, 경영, ‘위안부’의 모집, 수송에 이르는 전 과정은 군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갔다. 내무성, 외무성 등 일본정부기관과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도 적극 협력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현재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된 여성의 총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위안부’동원 인원수를 보여주는 체계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일본군의 ‘병사 몇 명 당 ‘위안부’ 몇 명’이라는 계획이 나타난 자료나, 여러 증언 자료에 근거해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총 수를 추측하기도 하였다. 일본군‘위안부’의 총수는 최소 3만명에서 최대 40만 명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며 연구자마다 많은 차이를 보인다.

위안소 설치 초기, 일본군은 일본과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 타이완에서 주로 여성들을 동원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일본의 점령지인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거주 네덜란드인 여성들도 일본군‘위안부’로 강제동원되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연구자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는 일본군‘위안부’ 수는 최소 8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중 조선인 여성의 비율이 절반이 넘는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동원형태 및 수송

조선인 여성이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된 방식은 취업사기, 협박 및 폭력에 의한 동원, 인신매매 및 유괴 등이다.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속여 여성들을 일본군‘위안부’로 동원하였다. ‘위안부’를 모집한다는 신문광고가 나가기도 하였으나 근무 내용을 분명히 고지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신문 구독 상태나 여성의 문자해독율 등을 고려할 때 여성에게 직접 모집 광고가 전달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고 보인다. 일본군 당국이 위안소를 경영할 업자를 선정하였고, 일본군과 경찰 역시 동원 과정에 협조했다. 업자들은 모집인을 이용하거나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여성들에게 접근하였다. 취직이나 돈벌이를 미끼로 여성들을 끌어 모으거나 협력과 폭력을 이용하여 동원하기도 하고, 심지어 납치하기도 했다. 총동원체제와 전쟁을 수행하는 데 ‘‘위안부’’가 필요하다는 일본군의 요구가 이러한 물리적 폭력을 허용했다. 태평양전쟁 발발(1941년) 이전에는 ‘도항증명서’를 받아 국외의 위안소로 이동하였다. 수속에 필요한 절차는 모집인이 공권력의 협조를 받아 도맡아하였다. 이 과정에서 호적이 위조되는 일도 있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는 ‘군증명서’를 통해 국외의 위안소로 이동하였다.
‘군증명서’는 모집인이나 인솔자가 소지했으며 일본군은 이동에 필요한 각종 편리를 제공하였다.

[출처 :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일본군‘위안부’ 구술기록집 『들리나요? 열두소녀의 이야기』중 발췌]

위안소 생활

나무막사로 지어진 상해 육군 오락소 위안부가 쓰던 방 위안소 밖까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군들

위안소의유형 및 설치시기와 지역에 따라 피해자들의 생활 형태는 다양했다. 동원된 여성들은 군인이 직영하거나 민간업자가 경영하는 위안소에서 생활했다. 민간 업자가 경영하는 경우라도 군이 위안소의 허가와 경영을 통제했기 때문에 사실상 군의 관리 아래 놓여 있었다. 직영위안소나 일본군이 새롭게 점령한 지역일수록, 전쟁 막바지로 갈수록 일본군의 통제가 강화되었다.

피해자들은 위안소에서 대부분 일본식으로 이름을 개명하여 사용했다. 외출이 허락되지 않거나 일정한 시간이나 범위 내에서만 외출이 가능했다. 작은 섬으로 동원된 경우에는 탈출이 불가능했으므로 외출에 별다른 제한을 받지 않았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직접 돈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신 병사 몇 명을 상대했는지 증명할 수 있도록 오늘날의 전표와 비슷한 군표(軍票)나 금권(金券)을 받았다. 나중에 표를 돈으로 바꿔준다는 말을 듣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업주가 관리를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대가를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오히려 동원 당시 이동비, 의복비, 식비 등과 위안소 생활비 등을 대가에서 공제하여 빚을 떠안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된 여성들은 성병 예방을 위해 콘돔을 사용하고 정기적으로 성병검사를 받아야 했다. 콘돔은 군인이 부대나 업주에게 지급받기도 하고, 업주가 여성들에게 지급하기도 했다. 성병검사는 1주일이나 2주일에 1번 받게 하였으나 시설이 열악한 곳에서는 1달에 1번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성병 예방을 위해 연고를 바르거나 소독물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위안부’가 성병에 걸리면 격리 조치 시켰으나, 업주가 군인을 계속 상대하게 하여 병이 악화되는 경우도 많았다.

일본군이 제정안<군위안소이용규칙>에는 ‘위안부’에 대한 학대 행위를 금지토록 하고 있으나 업주나 군인에 의한 일상적 폭력이 빈번했다. 자살이나 살해 사건이 생겨도 유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격전지로 동원된 ‘위안부’는 일본군과 생사를 함께 해야 했다. 전쟁터에서 폭격으로 사망하거나 수송 도중 수송선이 침몰하여 사망하기도 하였다.

[출처 :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일본군‘위안부’구술기록집 『들리나요? 열두소녀의 이야기』중 발췌]

위안소의 실상

  • 위안소의 형태 및 내부구조

    위안소 자체는 지역에 따라 달랐지만 진주하는 일본군들이 점거한 건물 일 때도 있었고 ‘위안소’라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군인들이 지은 임시 구조물이기도 했다. 전방의 경우 위안소는 대체로 텐트이거나 임시 목조 오두막이었다. 위안소는 일반적으로 일층 또는 이층짜리 건물로 밑에는 거실이나 접견장이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들의 방은 주로 위층이나 뒤쪽에 위치했고, 뒤틀리고 협소한 침실로 약 0.9mX1.5m 넓이의 침대 하나만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어떤 지역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들이 마루 위에 매트리스만 깔고 자야 하는 곳도 있어 심한 냉기와 습기에 노출되었다.

  • 감시 속의 성노예 생활

    위안소는 주로 가시철조망에 둘러싸여 있었고 철저하게 차단·감시되었다. 일본군 위안부들의 동태는 가까이서 감시되었고 제한을 받았다. 이러한 감시 속에서 그리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본군 위안부들은 매일 60명에서 70명의 군인들에게 성적 위안의 제공을 강요받아야 했다. 일반적으로 1인당 ‘사용’한도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너무나 많은 군인들이 위안소에 몰려서 ‘사용’시간 제한이 필요 없었다. 이런 탓에 한 사람이 2~3분 정도밖에 위안소를 ‘사용’할 수 없었으며, 20~30명이 문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 건강 검진

    일본군 위안부들에 대한 건강 검진은 군의관들이 했으나 이들에 대한 정기검진은 단지 성병 감염을 막기 위한 것이었고, 군인들이 여성들에게 가하는 담뱃불로 지진 상처, 멍, 총칼에 의한 자상, 부러진 뼈 등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 음식과 옷가지 등

    음식과 옷은 군에서 제공하였지만, 음식은 항상 부족하였다. 위안소의 규정에는 ’사용’시간에 따라 계급별로 위안부에게 돈이나 군표를 지불하도록 되어있으나, 실제로 위안부에 대한 ‘사용요금’의 지불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들의 대부분은 보수를 전혀 받지 못했거나, 군인들로부터 요금에 갈음하는 표는 받았지만 관리인에게 그것을 주고 돈으로 정산하지는 못했다.

  • 성병과 임신의 공포

    또한 일본군 위안부들은 항상 성병과 임신의 공포에 처해 있었다. 대다수의 위안부들은 성병에 감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감염기간 중 이들에게는 회복기가 주어졌으나, 다른 때에는 심지어 생리 중에도 이들은 계속 ‘일을 하도록’ 강요당했다. 모든 여성 피해자들이 느꼈던 깊은 수치심과 함께 이러한 상황들은 그들로 하여금 자살하거나 탈출을 기도하게 만들었는데, 그 같은 시도의 실패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출처 : 「일본군 위안부 문제-법적 쟁점의 정리와 최근 동향의 분석」 p25~26, 이석태 외 6명, 민족문제연구소, 2009]

해방 후 생활

[1944.08] 미얀마와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미군과 중국군의 보호를 받고 있는 위안부들 일본군 사령부 근처에서 미 해병 순찰대에 의해 발견된 위안부들(1945. 오키나와) 1944년 9월. 일본군에게 학살되어 파묻기 전 위안부들의 시체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되었다가 살아남은 여성들은 귀국도 여의치 않았다.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귀국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현지에 버려지다시피 했다. 일본군이 패전 후 ‘위안부’를 살해하는 일도 있었으며 대부분의 업주는 피해 여성들을 버려두고 귀국길에 올랐다. 피해 여성들은 일본 패전 후 혼자 힘으로 살아남거나 고향에 돌아올 방법을 찾아야 했다. ‘돌아갈 방법을 구하지 못해서’,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동원된 타국에 눌러 앉는 경우도 많았다.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귀국 후 심각한 육체적·정신적 후유증으로 끊임없이 고통 받았다. 구타 및 가혹행위로 인한 외상, 불임, 성병 등 일본군‘위안부’ 피해로 인한 직접적인 후유증이 오랜 시간 피해자들을 괴롭혔다. 육체적 고통은 진통제 등의 약을 계속 복용하게 하여 약물 중독도 뒤따랐다. 또한 자신의 몸에 대한 자결권을 가지 못했다는 모욕감, 피해 사실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받아야 할 불이익과 낙인에 대한 두려움, 삶의 패배감, 우울증 및 불면증 등의 심리적 외상 등으로 힘겨운 삶을 이어갔다. 피해 사실 때문에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하지 못하고 가족제도에 편입되지 못한 피해자는 빈곤의 악순환에 몰리기도 했다.

[출처 :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일본군‘위안부’ 구술기록집 『들리나요? 열두소녀의 이야기』중 발췌]